목공을 시작한 지 이제 1년 조금 넘었다.
아직 경험해 본 작업대가 몇 종류 되지도 않고, 어떤 형태의 워크벤치가 가장 좋은지 이야기할 만한 경험도 당연히 없다.
그런데 굳이 워크벤치를 직접 설계하고 만들었다.
이미 세상에는 오랜 시간 검증된 전통적인 워크벤치도 있고, 현대적인 작업 방식에 잘 맞는 기능적인 제품도 많다.
좋은 제품이 있다면 사서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목공방에서 이런저런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조금씩 욕심이 생겼다.
상판이 조금 더 넓어서 여유 있게 작업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MFT 홀에 끼우는 액세서리 들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늘어나는 시스테이너들을 잔뜩 수납하면서도 단순히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 중에 바로바로 꺼내 쓸 수 있도록 되어있다면 너무 편하겠다.
상판뿐 아니라 어느 방향에서도 부재를 손쉽게 고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여기저기 멀티탭을 끌어오지 않고 전원도 바로 연결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나중 일이긴 하지만, 추후에 만들어 보고 싶은 테이블쏘를 위한 전용 워크벤치와 라우터 테이블까지 하나의 시스템처럼 연결할 수 있으면 더 좋겠고.
하나씩 놓고 보면 사실 별것 아닌 조건들인데, 그걸 모두 한 작업대 안에 넣으려니 당연히도 시중에서는 마음에 드는 제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직접 만들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워크벤치를 만들어보자’ 하고 생각만 했던 초기에는 300여 년 전 프랑스의 앙드레 자코브 루보(André Jacob Roubo)가 기록했다는 육중한 목공 작업대인 ‘루보 워크벤치(Roubo Workbench)’에 관심을 가졌다.
두꺼운 상판과 굵은 다리, 무엇을 올려놓고 두드려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단순하고 명확한 구조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내가 막상 사용할 도구들은 18세기의 목공 도구가 아니다.
튼튼하고 역사가 깊은 설계인 점은 너무나 취향이지만, Festool의 전동공구와 MFT 액세서리를 사용하고, 공구들은 시스테이너 안에 들어 있으며, 배터리가 장착되는 디지털 테이블쏘를 사용하고 3D 프린터로 지그나 템플릿을 출력해 라우터로 깎아내는 현대적인 방식과 어울리는 기능들이 없는 워크벤치는 아무래도 좀 아쉽기도 하고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억지로 전통적인 작업대의 모습을 흉내 내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작업의 중심에서 단단하게 버틴다’는 태도만 가져와 보기로 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재료를 선택했다.
바로 알루미늄 프로파일(Aluminium Profile)..

40×40mm 중량 알루미늄 프로파일로 프레임을 잡고, 구조 사이의 면을 구성하는 재료는 HPL(High-Pressure Laminate) 합판을 사용했다.
상판 역시 HPL 합판에 MFT 홀을 CNC로 가공해 올렸다.
상판 바로 아래에는 세 방향이 모두 열린 캐치 트레이(Catch Tray)를 만들고, 그 아래에는 24개의 시스테이너를 넣을 수 있는 수납공간을 두었다.

atelier summer, MFT Workbench
넓은 상판을 원했기 때문에 아래쪽 공간은 비대칭으로 구성을 했는데, 한쪽은 시스테이너를 앞뒤 두 줄로 깊숙하게 수납하고, 반대쪽은 한 줄만 넣어 용도를 달리했다. 측면에는 측정 도구와 작은 공구를 위한 일반 서랍도 추가했다.
설계의 기초가 된 건 유튜브를 보다가 발견한 The Garage Journal 이라는 유튜버의 워크벤치 제작기(링크).
휴스턴에 있는 Johnson Space Center에서 영감을 얻어 알루미늄 프로파일을 이용한 작업대를 제작하게 되었다는 이 유튜브 영상은 워크벤치 제작을 계획 중인 나에게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워크벤치 제작이 처음인 건 물론이고 알루미늄 프로파일 자체를 사용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영상을 초 단위로 일시정지해가면서 분석해 Sketch Up에 내 나름의 설계를 만들어 갔다.
결과만 놓고 보면 전체 사이즈부터 디테일한 연결이나 마감 방식은 많이 다르지만, 기본적인 구조나 작업 방식만 놓고 보면 Tha Garage Journal의 영상이 없었다면 절대 나오지 못했을 워크벤치이다.

완성된 후 결과를 보면 무채색의 유니크한 외형이 돋보이지만, 사실 외형보다 먼저 결정된 것은 대부분 ‘작업하면서 반복하는 행동’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
벤치독을 이용해 상판에 부재를 고정하고,
공구를 꺼내고,
클램프나 측정공구를 쉽게 들어 사용하거나 내려놓고,
전동공구의 플러그를 연결하고…
그런 행동들이 가능한 한 끊기지 않도록 하나씩 자리를 만들어갔다.

물론 외형을 결정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반적인 알루미늄 프로파일을 그대로 사용했다면, 흔히 사용되는 자작나무 합판을 썼다면, 많이들 쓰는 서랍 러너를 썼다면…
방법적으로 여러 가지로 굉장히 수월하게 제작할 수 있었던 기회가 많았음에도 굳이 어려운 길을 택했다.
검은색과 진한 회색 조합의 무채색 워크벤치.
상판과 측판에는 검은색과 진한 회색의 HPL 합판을 사용하고, 알루미늄 프로파일은 시중의 검은 제품을 구입하지 않고 모든 절단과 홀 가공을 먼저 끝낸 뒤 별도의 업체에서 다시 블랙 아노다이징을 했다. 가공면이나 절단면에서 은색 알루미늄이 보이는 것이 싫었기 때문.
그러다 보니 서랍 레일과 손잡이, 캐스터, 콘센트까지 하나씩 검정 제품으로 세트를 맞추기 시작했다.
잘 보이지도 않는 검정 서랍 레일, 그것도 시스테이너가 2열로 배치된 방향에는 700mm 길이의 고하중 레일을 블랙 컬러로 찾아 구입하자니 그 과정이 얼마나 복잡하던지, 결국 찾다 찾다 영국에서 직구했고, 제품 가격보다 훨씬 더 비싼 배송비와 관세를 내고 수입했다는 쓸데없이 안타까운 일이…
지금 생각하면 꼭 그렇게까지 했어야 하나 싶지만. 뭐, 이미 해버렸으니 이젠 잊자.

꽤 오랜 기간 Sketch Up을 통해 수정에 수정을 거쳐온 설계는 화면 안에서는 모든 것이 정확하게 맞았다.
하지만 실제 부품들은 화면 속 모델처럼 얌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알루미늄은 절단하고 홀을 뚫고 클램프가 들어갈 홈을 별도 가공한 뒤 날카로운 엣지를 정리해야 했고, 그 모든 작업을 빠짐없이 끝내야만 아노다이징을 보낼 수 있었다. 캐치 트레이의 측면 노출부는 별도의 알루미늄 채널을 제작해 합판 두께와 완전히 맞춰 끼울 수 있도록 했고, MFT 상판은 CNC로 가공한 뒤 가공된 홀 안쪽을 흑단 오일로 칠해 마감을 해야 했다.
설계와 실제 제작 사이에는 생각보다 많은 문제가 숨어 있었고, 그 과정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WOOS 사장님과 함께 풀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atelier summer에 설치를 마쳤다.
위치를 잡고, 시스테이너도 올려보고, 벤치독도 꽂고, 클램프도 끼워봤다.
일단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외형.
일반적인 목공방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묵직한 포스와 함께 존재감을 뽐낸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였던 캐치 트레이는 생각보다 훨씬 편했고, 비대칭으로 구성된 시스테이너 수납도 의도했던 방식으로 작동해 불편함이 없었다.
다만, 마음에 들어 선택한 슈퍼 매트 검정 상판은 손자국이 생각보다 훨씬 잘 보였다. 어차피 나중이 되면 엄청난 톱밥과 나무 먼지로 뒤덮이겠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손자국이 남는 걸 신경 쓰는 편이라 계속 눈에 밟혔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알고 있지만 방치한 문제인데, 상판의 MFT 홀과 알루미늄 프로파일 일부에 간섭이 있다는 사실.
전체를 1/4로 나눠 정확히 알루미늄 프로파일과 하부 캐스터, 그리고 상판을 고정한 카운터싱크 볼트와 MFT 홀까지 정렬이 되는 것이 성격상 더 중요하다고 생각이 되어서 그렇게 제작을 했는데, 이것도 역시 마음에 좀 걸린다. 누군가에게는 기능적인 하자가 될 수도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래서 WOOS 사장님께 상판을 다시 제작 요청드렸다.
어쩌면 이런 것까지가 이 프로젝트의 일부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애초에 이 워크벤치는 완성된 하나의 가구를 만드는 것으로 끝낼 생각이 아니었다.
차후에는 Festool CSC SYS 50을 위한 Saw Bench가 연결될 예정이고, Woodpeckers의 라우터와 Quicklift를 넣은 Router Table도 이어질 예정이다.
MFT 홀에는 클램프와 벤치독뿐 아니라 MFT 홀 전용으로 만들어진 스틱 조명이나 카메라 같은 장치를 손쉽게 끼워 넣을 수 있는 모노포드 같은 걸 비롯한 다양한 전용 액세서리도 만들어보고 싶다.
그러니까 조금 거창하게 포장을 하자면,
이 MFT 워크벤치는 현재 상태가 완성품이라기보다는 “atelier summer Work System”의 첫 번째 모듈이 되겠다.

아마 몇 년 뒤, 아니 당장 몇 달만 지나도 지금은 보이지 않는 문제들이 훨씬 많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워크벤치는 내가 목공을, 그리고 가구 설계를 얼마나 잘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만든 물건이 아니라, 앞으로 목공을 더 오래, 더 재미있게 하기 위해 지금의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하나씩 잘 모아 만든 결과물이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보다 자세한 워크벤치의 제작 과정은 별도로 제작한 atelier summer의 프로젝트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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