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을 시작하고 이것저것 장비를 갖추다 보면 처음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도구들을 하나씩 알게 된다.
이번에 구입한 Slab Flattening Mill(슬랩 플래트닝 밀)도 나에게는 그런 장비 중 하나.

이름 그대로 커다란 원목 슬랩(Slab)의 표면을 평평하게 가공하기 위한 장비다.

판재를 평평하게 만드는 작업이라면, 내가 목공방에서 배우기로는 수압대패(Jointer)로 한쪽 면을 평평하게 만든 후 그 면을 기준으로 이어진 다른 한 면의 수직을 잡고, 자동대패(Planer)로 평평하게 만든 반대쪽 면을 가공하는 방법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큼지막한 테이블이라든지 벤치 상판으로 사용할 만큼 폭이 넓은 원목 슬랩 같은 경우는 일반적인 수압대패나 자동대패에 넣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이럴 때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가 라우터를 이용한 Router Sled, 그리고 이것을 조금 더 정밀하고 체계적인 장비로 만든 것이 Slab Flattening Mill 되겠다.

Slab Flattening Mill / source : woodpeckers

기본적인 원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가공할 슬랩의 양쪽에 서로 평행한 레일을 설치하고, 그 위를 가로지르는 또 하나의 레일과 라우터 캐리지를 움직인다. 라우터에 넓은 Flattening Bit(플래트닝 비트) 또는 Spoilboard Bit(스포일보드 비트)를 장착한 뒤 일정한 높이를 유지하면서 슬랩 전체를 조금씩 훑어가며 깎아내는 방식.

쉽게 말하면 커다란 슬랩은 움직이지 않게 단단히 고정한 후, 라우터를 정확하고 일정한 높이에서 움직이며 표면을 깎아내는 장비라고 보면 된다.

어차피 라우터는 곧은 레일을 따라서만 움직이게 되니, 뒤틀리거나 휘어진 슬랩도 먼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하고 한쪽 면을 평면으로 만든 다음 뒤집어 반대쪽을 가공하게 되면 두 면이 평행한 일정한 두께의 판재로 만들 수 있겠다.

Slab Flattening Mill / source : woodpeckers

물론 이런 Router Sled 자체는 구조가 복잡할 게 전혀 없다.

실제로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릴스 등을 보면, 합판이나 각재, 알루미늄 프로파일 등을 이용해 직접 제작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쉽게 볼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라우터가 움직이는 기준면을 얼마나 평평하고 평행하게 만들 수 있느냐, 바로 그거다.

그럼에도 굳이 내가 우드페커스의 완제품을 구입한 이유는 역시 정확도와 사용 편의성, 그리고 브랜드에 대한 신뢰감 때문이다.

Woodpeckers Slab Flattening Mill Pro

우드페커스에서는 현재 여러 크기, 그리고 여러 방식의 Slab Flattening Mill을 판매하고 있는데, 내가 구입한 제품은 그중 Pro 버전 기본형.

Pro 위에 Pro XL이라는 이름의 더 큰 모델이 따로 있어서 주문할 때까지만 해도 별생각 없이 ‘Pro 기본 모델 정도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이렇게나 거대한 장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미국으로부터 배송 온 패키지는 우리 집 현관 밖에 서 있었는데, 슈이가 “오빠 현관 앞에 오빠 택배 와 있는데 너무 커서 못 들고 왔어”라고 하는 거다.
보통 우드페커스에 물건을 주문하면 예약 판매인 경우도 많고, 시켜둔 것도 워낙 다양해서 뭐가 언제 올지 감이 없어서, ‘뭐가 온 거지?’ 하고 나가봤다가 패키지 크기를 보고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너무 커서 놀라고,
너무 무거워서 또 놀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훨씬 크고 무거워서, 처음에는 ‘아, 내가 Pro 기본 모델을 시켰어야 하는데, Pro XL을 시켰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실제 규격을 다시 확인해 보니 그럴 만했다.
내가 제대로 주문한 게 맞고, 원래 이렇게 크고 무거운 게 맞단다.

Pro가 가공할 수 있는 최대 슬랩 크기는 48.5 x 58inch, 대략 1,232 x 1,473mm.
Pro XL의 경우에는 폭은 같은 48.5inch이지만 길이가 무려 134inch, 약 3.4m까지 늘어난 모델이다. 그러니까 Pro가 작은 제품인 것이 아니라, Pro XL이 미친 듯이 큰 제품이라는 게 더 맞는 말이겠다.

아, 아직 인치 단위의 제품은 대충 보고 사면 안 되는구나..를 다시 한번 뇌리에 깊이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크로스 레일(Cross Rail)과 라우터 캐리지(Router Carriage)가 일정한 평면을 유지하면서 부드럽게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직접 만든 라우터용 썰매에서도 같은 원리를 구현할 수야 있겠지만, 일단 내가 직접 만들 자신도 없을뿐더러 만든다고 한들 캐리지의 움직임까지 처음부터 하나의 시스템으로 만들어져 있는 이런 제품을 자작 도구가 감히 따라갈 수가 있을까 싶다.

또 하나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가공할 수 있는 두께의 범위.

Pro의 라우터 캐리지는 별도의 공구 없이 5단계의 높이 조절이 가능하고, 전체 조절 범위는 2-1/2 inch(약 63.5mm)로 캐리지를 가장 높은 위치에 두면 최대 3-3/8 inch(약 85.7mm) 두께의 슬랩까지 가공할 수 있다.

사실 내가 그 정도 두꺼운 원목 슬랩을 다룰 일이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어쨌든 장기적인 작업 영역 확장을 생각하면 꽤나 중요한 장점 되겠다.

와.. 정말 어마어마한 부품들.
집진을 위한 2.5″ 주름관과 Y 커넥터, 2.5″ 더스트 포트 같은 큰 부품을 제외하고도 자잘한 부속들이 여러 지퍼백에 나뉘어 담겨 있는 모습.

우드페커스의 시그니처 컬러인 레드 아노다이징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가이드 블럭.
역시나 너무 멋지다.

Pro 모델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의 차이는 집진 시스템.

트리머나 라우터를 한 번이라도 사용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한 번 나무 위를 깎으며 지나가게 되면 정말 엄청난 톱밥과 나무 먼지들로 주변이 난리가 난다. 게다가 이 장비는 넓은 면적의 나무를 계속 깎아내는 작업용으로 만들어진 만큼 그 톱밥과 나무 먼지, 그리고 칩들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우드페커스의 일반 Slab Flattening Mill은 별도의 Dust Collection Shroud를 추가할 수 있는 구조지만, Pro에서는 처음부터 집진 기능을 라우터 캐리지에 통합했다.

라우터 비트 주변을 유연한 고무 재질의 커튼 구조가 둘러싸고 있고 두 개의 집진 포인트(Twin Pick-up Points)에서 발생하는 톱밥을 바로 빨아들이도록 만들어져 있다.

완전히 밀폐된 CNC 같은 구조는 아니기 때문에 모든 분진을 다 잡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정도 규모의 라우팅 작업에서는 그래도 이런 구조라면 상당히 실용적인 차이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뭐, 목공을 시작할 때부터 늘 이야기하던 거고, 아직도 크게 변하지 않은 방향성이라면, 앞으로 내가 할 목공 작업은 대부분 소규모의 아기자기한 작업물일 것이라는 것이긴 한데, 언젠가는 원목 슬랩도 깎을 일이 있겠지.. 라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내가 이 장비를 구입한 진짜 목적은 사실 커다란 원목 슬랩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목재는 나뭇결의 방향에 따라 보이는 모습이 살짝씩 다른데, 나무를 섬유 방향과 직각으로 잘랐을 때 드러나는 단면을 ‘엔드 그레인(End Grain)’이라고 한다. 나이테와 목재 조직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일반적인 판재의 면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느낌을 보여준다.

흔히 볼 수 있는 활용법은 여러 종류의 목재를 이어 붙여 만드는 엔드 그레인 도마(End Grain Cutting Board) 정도가 되겠다.
수분 흡수도 빠르고 표면도 비교적 거칠 것 같은데 굳이 도마로 만드는 게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지만, 많이들 만드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어쨌든 나는 이걸 도마가 아니라 다른 목적의 패널들로 활용해 보고 싶다.

서로 다른 수종이 가진 목재 본연의 컬러들을 조합해 트레이도 만들고, 가구 상판이나 도어로도 적용해 보고 싶다.
그래서 자동대패도 목공방 규모에 비해 조금 사이즈를 키우긴 해두었지만, 왠지 나중에는 그것보다 더 커지거나 직접 라우터로 갈아내고 싶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미리미리 구입을 해두었달까나..

아래는 내가 작업하고 싶어서 틈날 때마다 규격화해서 저장해 두고 있는 패턴 중 일부.

워낙 다양한 패턴들로 많이들 만들고 있지만, 취향에 맞는 패턴은 제한적이라서 일단 내 취향대로 일러스트레이터에서 그려서 모아두는 중이다.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을 입체 패턴.
한 종류만 막대로 만들어서 잘게 잘라 이어 붙이면 되는 거라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일단은 첫 번째로 만들어 볼 생각.

역시나 초반에는 막대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패턴으로 접근을 해보려 한다.
컨트라스트가 강한 두 개의 수종만을 이용해 방향만 돌려 모아 완성한 모던한 패턴.

너무 복잡하기만 한 입체 패턴은 그다지 취향은 아니다.
위의 두 패턴은 솔리드한 하나의 사각형을 기본으로 Y자 형태의 입체 면을 높이만 달리해서 깊이감이 달라 보이게 한 배리에이션 두 종이다.

아뜰리에의 건물 모양과 비슷한 패턴을 구상해 봤다.
직사각 형태의 두 개 막대를 만들어 잘라 붙이면 되겠다.
사실 실제로 만들었을 때 결과가 이쁠 거라는 확신이 없는 패턴이긴 하지만, 아뜰리에 시그니처로 꼭 한번 제작해 보려고 한다.

복잡한 패턴 중에 그나마 취향인 입체 정육면체가 엮인 것처럼 보이는 기하학 패턴.
고야드백의 시그니처 패턴과도 살짝 비슷한 듯하면서도 조금 다른 그런 패턴인데 4개의 컬러가 들어가야 하는 복잡한 패턴이라 제작 과정에서의 난관이 예상된다. 총 6종류의 삼각형 막대를 준비해야 하는 어려운 구조이지만, 일단 조금 크게 만들면 굉장히 멋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Slab Flattening Mill이라는 장비의 원리만 놓고 보면 꼭 이렇게 비싼 완제품을 구입해야 하는 물건은 아니고, 내가 엄청나게 잘 사용하리라는 생각도 사실 들지는 않는다. 게다가 우드페커스의 이 사악한 가격까지 생각하면 상당히 사치스러운 Router Sled인 것은 분명하지만, 어쨌든 언젠가 엔드 그레인 패턴 패널을 만들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바로 실행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놓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일단 구입을 해봤다.

그런데.
이 큰 걸 어디에 어떻게 보관을 하지??
아, 고민이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