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제주에 대한 특별한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이야 너무도 많겠지만, 나 역시 그중 하나다.
갤러리를 만들고, 그곳에 집도 갖게 되면서 제주는 단순한 여행지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몇 해 전 제주를 배경으로 해 제작된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드라마 역시 인생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감동을 받았던 좋은 작품이었는데, 그런 제주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또 나왔다는 소식만으로도 나는 이미 마음이 기울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처음엔 애순이와 관식이, 두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이야기는 광례와 애순이, 애순이와 관식이, 그리고 금명이로 이어지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긴 여정이 된다.
혹자는 이 드라마를 ‘슬픈 드라마’라고 말한다.
하지만 드라마를 다 감상한 후의 개인적인 감상을 단순히 슬픔으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나 역시 감상중에 눈물 꽤나 쏟긴 했지만.. 매회마다 정말 울고 웃으면서 여러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드는 감성적으로 풍성한 작품이었다.
굳이 슬픔과 기쁨 중 가까운 쪽을 꼽자면 종합적으로는 ‘기쁨’에 가까운 감정인 것 같다.
누군가의 인생을 함께 걸으며, 그들이 흘린 눈물과 웃음에 공감하고, 그들의 선택을 이해하려 애쓰고, 때로는 함께 분노하고, 위로받기도 했기 때문인데, 그렇게 나는 드라마의 주인공들과 함께 긴 인생을 잘 살아낸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슬픈 드라마로 여겨지지 않는 데에는 억지로 울음으로 몰고 가는 흔히말하는 ‘신파’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이유도 있겠다.
감상은 잠시 미뤄두고 작품에 대해 하나씩 짚어 이야기를 해나가보고 싶은데,
많은 이들이 ‘연기 차력쇼’라고 표현할 정도로, 이 작품은 정말 엄청난 연기파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것은 물론 각각의 캐릭터들의 일생을 진심으로 연기한다.
특히 애순이와 금명이, 두 인물을 한 회 안에서도 몇 번이고 넘나들며 연기한 아이유는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1인 2역이라는 설정 자체가 자칫 어색해질 수 있는 연출이었지만, 오히려 시대와 감정의 간극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며 시청자가 한 흐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멋진 전개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소리 배우의 연기도 감탄 그 자체.
외모에서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해 걱정했던 것도 기우, 두 사람의 애순이가 너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어느 순간 완벽히 캐릭터에 몰입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 깊이 남는 역할은 ‘양관식’이라는 인물.
나도 아버지의 입장이라서 일까, 아니면 내가 바라는 남성상의 모습이 거기 있었던 걸까. 어쩌면 우리 아빠를 비춰본 것 같기도 하다.
누구보다도 강직하고 성실했던 ‘무쇠’ 양관식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몸과 시간을 기꺼이 희생하면서도 단 한 번도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다. 그물을 당기느라 손가락이 망가지고 늘 상처 입고 병들면서도 끝까지 변치 않는, 조용하고 우직한 사랑. 그렇게 약해지는 마지막 모습에는 자꾸만 눈물이 났다.
죽고 나서도 애순을 위해 그릇들을 손 닿는 곳으로 옮겨둔 것이며 머리핀을 잔뜩 사다놓은 모습 역시 가슴을 꽉 조이는 듯 한 애틋함이 느껴졌다.
주조연은 물론이고, 아역부터 단역까지. 이 드라마는 그 누구 하나 허투루 지나가지 않는다.
모두들 연기자가 아니라 그 배역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인물이 몇 있다.
처음으로는 애순이 엄마 전광례(염혜란 扮).
염혜란 배우는 더 글로리의 ‘강현남’ 역할에서 부터 이미 연기가 아닌 그 캐릭터 자체를 보여주곤 했는데, 이 작품에서도 억척스러우면서도 누구보다 애순이를 사랑한 엄마로 보는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설정상 출연 회차는 그리 길지 않았으나 회상씬 등으로 자주 등장을 하는데 등장할 때마다 별 대사없이 눈시울을 뜨겁게 만드는 엄청난 연기.
관식이 엄마 권계옥(오민애 扮)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래오래 등장을 하는데 극의 주된 내용을 이끌거나 하지는 않지만 툴툴거리면서도 한발짝 뒤에서 챙겨주고 지원해주는 속깊은 엄마이자 시어머니 역할을 연기했다. 애순이가 계장이 되어 잔치가 열렸던 회차에서의 생활 연기가 정말…
“학-씨!”로 유명해진 부상길(최대훈 扮)은 그 시대에 흔히 있었을 것 같은 쓰레기 캐릭터 였는데, 마지막에는 자신을 되돌아 보며 서툴게 회복하려는 모습을 보이며 그저 악역으로만 머무르지 않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선보였다. 연기력은 말해뭐해.
금명이 첫사랑인 영범의 엄마 윤부용(강명주 扮)은 은명이 친구 철용이의 미용사 엄마와 함께 몇 안되는 진짜 악역 중에 하나다. 영범의 부모가 상견례 자리에서 금명이를 막대하는 장면은 정말 보기 힘들었다. 내가 딸가진 부모라서 그런가? 우리 딸은 아직 시집가려면 멀었는데..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명의 남편이 된 박충섭의 엄마 분희(이지현 扮)는 막상 작품에 몇 번 출연하지는 않았지만 애순에게 곶감을 보내며 보낸 편지의 내용이 너무 아름다워 굉장히 기억에 남는다.
설정상 1960년대 부터 2025년 현재까지 여러 세대에 걸친 시대적 배경과 공간, 환경, 문화, 소품들까지 고증을 필요로 했을텐데, 수십 년에 걸친 시대의 흐름을 표현하면서도 전혀 어색함이 없이 완성해낸 디테일은 그저 ‘잘 만들었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이 들었을지, 상상만 해도 경이롭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임상춘 작가. 알려진 정보는 거의 없고, 임상춘이라는 필명이고 30대 후반의 여성이라는 소문만 들리던데, 이 어린 작가가 어떻게 그리도 정확히, 그 시절 어르신들의 말투와 감정을 대사에 담아낼 수 있었을까.
때로는 시처럼, 때로는 뼈처럼 다가오는 대사 하나하나가 너무나 마음 깊이 새겨진다.
제주 파란 바당 위를 활어처럼 튀어오르는 젊음이 주는 눈부심,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되어 진짜 부모로 성장해가며 겪는 막막함과 무거운 책임감,
고된 세월을 견디며 가족을 지켜내는 우직함,
그리고 겪어보지 못해 상상하기도 힘든 상실의 고통까지..
나는 이 작품을 통해 나의 인생, 나의 주변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드라마의 영어 제목은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 (인생이 너에게 감귤을 줄 때)”.
영미권 속담인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 (인생이 너에게 레몬을 주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는 인생이 시련을 주더라도 그 안에서 긍정을 찾아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데, 그 말을 감귤로 바꾼 저 제목이, 이 드라마의 톤과 너무도 닮아 있다.
때로는 시고, 때로는 달고, 손끝에 남은 향까지 오래 기억되는 감귤처럼. 이 드라마는 우리 모두의 인생을 닮아 있다. 그리고 그 인생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다시금 일깨워준다.
어렸을 땐 손 붙들고 있어야 따신 줄을 알았는데
이제는 당신 없어도 계신 줄을 압니다.
이제는 내게도 아랫목이 있어,
당신 생각만으로도 온 마음이 데워지는 걸.
낮에도 달 떠있는 거 알듯이 살겠습니다.
그러니, 가려거든 너울너울 가세요.
오십 년만에 훌훌, 나를 내려두시고
아까운 당신,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꼬운 당신, 폭싹 속앗수다.
두고 가는 마음에게, 오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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