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프린터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로 생각보다 목공과 3D 프린터의 궁합이 꽤 좋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 여러 번 했던 것 같다. 

작업에 필요한 작은 부품이나 지그를 직접 설계해서 만들 수도 있고, 기존 공구에 딱 맞는 어댑터나 홀더처럼 기성품 중에서 찾기 애매한 물건도 필요할 때 바로 만들어 쓸 수 있다. 특히 페스툴(Festool)처럼 하나의 규격과 시스템을 중심으로 수많은 공구와 액세서리가 연결되는 브랜드라면 3D 프린터로 만들어볼 만한 물건은 더 많아진다.

일단은 나도 목공 관련 릴스나 쇼츠 영상들을 보다가 딱 그 부분에 꽂혀서 정확히 그 목적으로 3D 프린터를 구입하게 된 거고.

그런데 잘 만들어진 목공용 3D 프린팅 결과물들을 보다 보니 페스툴 제품들과 너무나 잘 어울리게 만들어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아니, 아무리 Bambu Lab 필라멘트 페이지를 찾아봐도 페스툴의 딱 그 컬러들은 없던데, 도대체 뭘로 만든 거야? 하던 중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페스툴이 공식적으로 필라멘트를 판매하고 있잖아??

이런 걸 또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얼른 구입해 보자.. 라는 생각에 찾아보는데..

일단 국내에선 판매하는 곳을 찾기 힘들다. 
페스툴 코리아의 공식 사이트에도 정보가 없는 걸로 봐서 정식 수입도 안 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내가 몰랐지..

해외 쪽에서도 쉽게 구해지지는 않았다. 
상품이 등록되어 있는 판매처는 꽤 있는데 대부분 품절 상태. 
가끔 판매하는 곳을 찾아도 공식적으로 판매되는 두 컬러 중 하나만 겨우 있곤 했다. 

그래서 찾다 찾다 결국 처음 들어본 독일의 쇼핑몰에서 독일 배송 대행지로 주문을 했고, 며칠 전 드디어 물건을 받아보게 되었다. 
영어 지원도 안 하는 독일 쇼핑몰이라 혹시나 잘못 주문했을까 봐 노심초사했는데 다행히 오긴 왔다.

 

Festool, Filament FIL-BL (578974) & FIL-GN (578975)

페스툴에서 판매하는 3D 프린터용 필라멘트다. 
어차피 국내에서 구하기도 힘든데 살 때 잔뜩 사자..는 마음으로 여러 개를 구입했다. 대략.. 10개 정도?

처음 제품을 발견했을 때는 페스툴이 필라멘트까지 직접 만드는 건가 싶었는데, 실제 제조사는 독일의 3D 프린팅 업체인 CR-3D(Ingenieurbüro Christian Reil)다. 페스툴(Festool) 브랜드로 판매하면서 페스툴의 3D 프린팅 액세서리를 출력하는 용도로 준비한 제품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종류는 총 두 가지.

FIL-BL은 페스툴 공구의 메인 바디에 주로 사용되는 짙은 블루 컬러,
FIL-GN은 설명할 필요도 없는 페스툴 그린(Festool Green)이다.
둘 다 직경 1.75mm, 1kg의 PETG 필라멘트이며 색상을 제외하면 기본적인 사양은 동일하다.

아무래도 장난감이나 장식품을 만드는 목적이 아닌 실제 작업에 사용되는 도구들을 만들도록 의도된 제품이기 때문에 PLA보다는 PETG가 당연히 맞겠다. 
공식적으로 안내하는 출력 조건은 노즐 온도 235-255°C, 베드 온도 60-80°C, 부품 냉각 팬 75-100%.

 

포장을 뜯어보니 투명한 스풀에 감긴 필라멘트를 만날 수 있었다. 

Made in Germany.
한 롤에 1kg.
스풀의 크기는 외경 20cm, 폭 6.6cm, 중심부 내경 5.3cm 정도.

그런데 페스툴 공구를 사용하면서 3D 프린터로 액세서리를 만들어 본 사람들이라면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해외 페스툴 유저 커뮤니티를 찾아보면 꽤 오래전부터 어떤 필라멘트 컬러가 ‘Festool Green’하고 가장 비슷한가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RAL 6018 계열의 필라멘트부터 여러 제조사의 Lime Green, Neon Green 같은 제품들이 언급됐고, 실제 페스툴 제품과 나란히 놓고 색상 비교를 하기도 한다. 

오.. 내가 혼자 조용히 하던 짓에 당연히도 이미 선구자가 있었구나.
기능적으로는 아무 색이나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지만, Festool 공구에 붙여서 사용하는 액세서리라면 이왕이면 Festool 컬러로 만들어져 있는 편이 훨씬 보기 좋으니까.

아마 페스툴이 그런 니즈를 파악한 건지, 비슷한 색 그만 찾아다니고 제대로 한번 써 보라는 의미로 공식 판매를 결정했나 보다. 
공식적으로 전용 컬러의 필라멘트도 판매하면서 아예 공식 사이트에서 3D 프린팅 관련 페이지(링크)를 마련해 두었더라.

거기엔 페스툴의 공구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액세서리를 소개함과 동시에, 실제 출력에 필요한 3D 모델도 Printables(링크)를 통해 제공하고 있었다!

 

printables.com / Festool

Abrasive Holder, Clamp Holder, Guide Rail Holder, Suction Hose Holder, Battery Holder 등 대충 둘러봐도 여러 쓸모 있어 보이는 도구들이 잔뜩. 
단순히 재미 삼아 몇 개의 만들어 올려둔 정도가 아니다.

각 모델은 실제 Festool 공구에 맞도록 설계되어 있고 출력에 필요한 권장 조건도 함께 제공한다.
사용자들의 의견과 요청을 받아 출력 모델을 계속 추가하고 개선하겠다는 설명까지 되어 있다.
말 그대로 3D 프린터를 자신들의 시스템 확장의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셈.

이런저런 모델을 보다 보니 재미있는 사실도 알게 되었는데,
페스툴이 무료 3D 프린팅 데이터로 공개했던 Guide Rail Holder가 사용자들에게 꽤 인기를 얻었고, 결국 2026년에는 FS HA-FS/2라는 이름의 정식 제품으로 출시되는 일도 있었다는. 사용자가 직접 출력해서 사용하던 액세서리가 반응을 얻고, 그것이 다시 Festool의 정식 제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마치 레고에서 아이디어를 출품하고 실제 제품으로 제작되어 판매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랄까?
예전의 CUUSOO, 최근의 LEGA Ideas 같은?

어쨌든 3D 프린팅 데이터를 단순한 홍보용 콘텐츠 정도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제품 생태계와 연결해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꽤나 흥미롭다.

 

그래서 필라멘트만 개봉해 보고 끝내려다가 궁금해서 결국 하나 다운로드 받아서 출력해 보기로 했다.

여러 모델들을 둘러보다가 고른 것은 Abrasive Holder.
지름 150mm의 원형 샌딩 페이퍼를 보관할 수 있는 홀더다.

내가 사용하는 Festool 샌더가 150mm 규격이라 D150 모델의 3MF 데이터를 다운로드했다.

초보자 입장에서는 다운로드하는 것부터 난관.
D90, D125, D150부터 Delta, Orbital, RO90 등 샌딩 페이퍼 규격에 따라 파일이 전부 나뉘어 있고, 같은 D150 안에서도 small, big, TOP, Positioning Aid, End Cap 등으로 다시 여러 파일이 존재한다. 게다가 STL과 3MF가 따로 있고 Prusa MK3, MK4용으로 미리 슬라이싱된 파일까지 잔뜩 준비되어 있다.

아..
잘 준비되어 있기는 한데 3D 프린터 초보인 나에게는 오히려 너무 잘 준비되어 있어서 뭘 받아야 하는지 한참 들여다봐야 했다.

결국 가장 기본적인(?) 150mm Small 모델과 Positioning Aid를 골라 3MF로 다운로드 받고 출력해 봤다.
그런데, 내가 뭘 잘못한 건지, 설명과는 다르게 다운로드한 3MF 파일에서 별도의 세팅 값은 불러오지 못하고 단순 모델만 불러올 수 있었다. 

 

해당 모델 페이지에 출력 정보가 쓰여있길래 일단 오브젝트 컬러만 개별적으로 지정하고 딱 쓰여있는 내용만 손을 댔다.

Material: PETG (recommendation); PLA (alternative)
Layer Height: 0.2mm (recommendation)
Orientation: On the Bottom
Support: None
Infill: 20% (3D Honeycomb) 

역시나 컬러가 딱 맞으니 그냥 대충 출력했는데도 꽤나 그럴 듯?
괄호 안쪽을 자세히 안 보고 세팅을 해서 3D Honeycomb 세팅을 안 했는데, 그래서 그런가 글씨가 뭔가 자수로 새긴 느낌이 나긴 하지만..
어쨌든 컬러 조합이 마음에 들어서 다 용서해 줄 수 있다.

 

글씨가 작아서 좀 찌글찌글하게 출력이 되긴 했지만, 모델 뒤쪽에 #myprintedfestool 이라는 글자가 아예 모델링 되어 있다.
페스툴이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해시태그.

페스툴의 3D Printing 페이지에도 #myprintedfestool이라는 문구가 걸려 있고, 직접 출력한 페스툴 액세서리와 아이디어를 이 해시태그를 통해 공유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모델 파일만 던져주고 끝낸 것이 아니라, 사용자들이 직접 출력하고 사용하고 공유하는 것까지 하나의 프로젝트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
전체적으로 꽤나 멋진 프로젝트 전개 방식인 것 같다.

 

만들었으면 샌딩 페이퍼를 끼워보긴 해야지.
집에 있던 GRANAT MIX PACK D150 제품을 열어서 출력물에 끼워보았다.

 

높이라든가 뚜껑 같은 여러 옵션이 있었지만, 시험 삼아 가장 낮은 모델을 출력해 본 건데, 샌딩 페이퍼 자체가 겉면의 요철 때문에 두께를 차지해서 몇 장 보관하기 힘들 것 같다. 
다음에 출력하게 된다면 높이가 높은 모델을 출력해서 써봐야 할 듯. 

앞쪽으로 손잡이가 달린 Positioning Aid를 아래쪽에 깔았는데, 샌더의 집진 구멍에 Positioning Aid의 돌기가 딱 맞게 끼워지면서 눈으로 구멍을 맞춰가며 샌딩 페이퍼를 붙일 필요 없이 손쉽게 장착이 가능하겠다.

 

Festool 브랜드를 달고 판매가 되긴 하지만 필라멘트 자체만 놓고 보면 특별한 지는 잘 모르겠다.

페스툴은 이 필라멘트가 안정성과 내구성,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내열성을 특징으로 하며, 화학물질에 대한 저항성과 난연성도 갖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1.75mm PETG라는 기본적인 규격은 흔하고, 이번에 한 번 출력해 본 것만으로 일반적인 PETG보다 출력성이 뛰어나다거나 하는 건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서.

일단 컬러는 페스툴의 딱 그 컬러라서 너무 예쁘다.

다만 내 생각에 이 제품의 재미는 애초에 그런 곳에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자신들의 공구에 맞는 3D 데이터를 직접 만들어 무료로 공개하고, 사용자들의 의견을 받아 모델을 계속 확장하는, 그리고 사용자가 만든 결과물에는 #myprintedfestool이라는 태그를 붙여 하나의 커뮤니티로 연결하고, 인기가 검증된 출력물은 실제 제품으로 만들어 판매하기도 하는 이 방향성이 꽤나 마음에 들고, 나도 한 숟가락 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게 페스툴이 의도한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