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독일 하이델베르그에서 설립된 필기구 전문 브랜드 ‘LAMY(라미)’.
초기에는 파커(Parker)의 영업 관리자였던 ‘요제프 라미(C. Josef Lamy)’가 독립하여 세운 회사였으나, 1966년 ‘바우하우스’ 정신을 계승한 LAMY 2000 시리즈를 출시하며 현대적인 디자인에 기능까지 겸비한 필기구 아이콘으로 자리 잡아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나름 문구류를 좋아는 하지만 마니아라고 까지는 하기 힘든 가벼운 애호가인 나 역시도 라미를 꽤나 좋아해서 가지고 있는 이런저런 라미들을 합치면 최소 대여섯 자루는 가지고 있을 것 같다.
그중에서도 1980년 ‘볼프강 파비안(Wolfgang Fabian)’이 디자인한 ‘LAMY Safari(라미 사파리)’는 영원한 스테디셀러.
원래는 어린 학생들의 올바른 필기 습관을 돕기 위해 개발된 교육용 만년필이었던 이 제품은, ABS 수지의 가벼운 무게감에 커다란 와이어 클립, 그리고 손에 착 감기며 쥐어지는 삼각형 형태의 그립 존 등의 강점을 앞세워 현재까지도 남녀노소를 불문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내가 이번에 구입한 제품은 그 LAMY Safari에 KURU TOGA라는 기술이 합쳐진 제품.
바로 LAMY, Safari KURUTOGA Inside 되겠다.
평소 문구류에 관심은 있는 편이라 쿠루토가 기술에 대해서 가볍게 알고는 있었는데 뜬금없이 라미와 쿠루토가 라니?
이 글을 쓰려고 잠깐 찾아보니 2024년 2월에 쿠루토가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미쓰비시 연필(三菱鉛筆/Mitsubishi Pencil)’이 독일의 ‘라미’를 인수했다고!!
아니 이럴 수가..
여기서 라미를 인수한 ‘미쓰비시 연필’은 자동차 회사 미쓰비시 그룹과는 전혀 상관없는 회사.
사실 두 회사의 규모나 자본력 등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당연히 내 기준으로 더 인지도 높은 라미가 미쓰비시 연필을 인수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이번에 알아보니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설립연도도 미쓰비시 연필은 1887년으로 140년 가까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회사이며, 연간 매출도 8천억 정도 되는 엄청나게 큰 회사인데 반해,
라미는 글로벌 인지도 등에서는 우위에 있었을지 몰라도 연 매출 1천억 정도에 직원 수도 대략 미쓰비시 연필의 1/10 수준의 규모였던 것.
결국 미쓰비시 연필 입장에서는 글로벌 인지도가 큰 라미의 브랜드가 필요하고,
라미는 급변하는 필기구 시장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이 필요해 이런 빅딜이 성사된 것으로 보면 되겠다.
이렇게 빅뉴스를 완전히 모르고 있었네.

어쨌든 내가 구입한 이 ‘LAMY, Safari KURUTOGA Inside‘ 제품이 이 인수합병의 첫 번째 결과물인 것으로 보인다.
미쓰비시 연필도 회사 이름만 들으면 자동차와 중공업을 다루는 미쓰비시 그룹에 비해 생소하게 여겨질 수 있겠지만, 사실 유니(uni), 제트스트림(Jetstream), 포스카(POSCA) 이런 브랜드를 들으면 ‘아, 그거!’ 하고 많이들 알만한 제품을 꾸준히 생산하며 기술력을 자랑해온 브랜드.
기술력의 미쓰비시 연필이 라미를 인수한 후, 첫 번째 제품에 적용한 기술이 ‘쿠루토가(Kurutoga)’ 라는 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KURU TOGA(クルトガ/쿠루토가)’는 간단히 설명하면,
샤프를 사용하다 보면 샤프심의 한쪽만 닳아 선이 굵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기술.
샤프심의 한쪽만 닳는 현상을 ‘카타베리(偏減り, 편마모)’라고 하던데, 어쨌든 이 쿠루토가 엔진은 샤프심이 종이에 닿을 때마다 발생하는 상하 압력을 이용해 내부의 기어가 샤프심을 조금씩 회전시켜 골고루 마모시켜 선 굵기를 일정하게 하는 대단한 기술이며 미쓰비시 연필의 uni 브랜드에서 이미 여러 제품으로 판매가 되고 있다.
물체가 도는 모양을 나타내는 의태어인 ‘쿠루쿠루(クルクル)’와 뾰족하다는 뜻이 형용사 ‘토가루(尖る)’를 합쳐 만든 이름이라는데,
안 그래도 실제로 사용해 보고 싶은 기술이었는데 쿠루토가 엔진을 장착한 라미 사파리라니!! 너무 좋잖아.

source : lamy
이 제품도 기존 라미 사파리 제품처럼 매년 새로운 스페셜 컬러 제품이 출시되겠지만, 일단 첫 런칭은 위 사진처럼 네 가지로 출시되었다.
블랙, 비스타(투명), 블루, 옐로.
내부의 쿠루토가 엔진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비스타가 가장 인기가 많은 것 같던데, 나는 옐로를 골랐다.
이미 레드와 그린 등등 여러 컬러의 제품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넷 중에는 가장 눈에 잘 띌 것 같아서.

사실 일부러 사려고 찾은 건 아니고, 다른 볼일 때문에 유라쿠초의 ‘빅 카메라(ビックカメラ/BIC CAMERA)’에 들렀다가 광고를 보고 덥석 집어와봤다.
아이코닉한 외형은 가졌지만 샤프 내부 기술로는 사실 특별할 게 없었던 라미 사파리에, 정밀 기술력의 일본 샤프 메커니즘이 접목되었다지만, 일단 외형으로는 그냥 사파리와 큰 차이가 없다.
가격은 4,180엔인데 패키지는 엄청 얇은 종이로 만든 구멍 숭숭 뚫린 상자라니.. 뭔가 원가 절감의 냄새가 좀 나네.

전문가가 아닌 라이트 유저 입장에서 굳이 기존 사파리 샤프와 비교를 해보자면,
일단 외형적으로는 위쪽 뚜껑에 고무링(?)이 없어졌고,
앞쪽 뾰족한 원뿔 부분은 물론 뒤쪽의 버튼 밑 움푹 들어간 부분까지 모두 같은 색으로 통일이 되었다는 점이 가장 다르다.
전체적으로 원톤으로 더 매끈하고 심플해진 느낌.

무게는 좀 더 무거워진 것 같기도 하지만, 뭐 재질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크게 무거운 필기구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 차이가 크지는 않다.
제품 설명을 보니 무게 중심이 조금 아래로 내려가 샤프의 정 중앙쯤에 위치한다고 하던데, 변화의 체감이 크지는 않다.

앞쪽 뾰족한 원뿔 부분은 기존 제품과 달리 매끈하게 연결되어 보이지만 돌리면 풀어지고,
중간 배럴 부분은 나눠져 있긴 한데 힘줘 돌려도 풀리지는 않는다.
뒤쪽의 버튼에도 고무링 말고도 옆쪽에 홈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없어진 점은 오히려 깔끔해서 좋다.
다만 위쪽에서 보면 원형 외곽을 따라 곡선 형태로 3개의 홈이 뚫려 있는데, 이건 왜 뚫은 걸까?
뭐 그다지 크게 거슬리지는 않지만.
일단 잠깐 아무 글씨나 막 써봤는데.. 오!! 쿠루토가!
샤프를 손에서 돌리면서 쓰지 않아도 날카로움을 유지시켜 준다.
더 오래 써봐야겠지만 상당히 마음에 드네.
어 그런데, 앞에 샤프심을 잡아주는 금속 파이프 촉이 원래 안쪽으로 들어갔던 거 같은데..
이건 안 들어가네. 쿠루토가는 원래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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