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이웃에 사는 동생과 점심 식사를 했다. 
집도 가깝고, 만날 때마다 두런두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편하게 나눌 수 있다 보니,
꽤나 정기적으로(?) 만나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신다. 
사실 집 밖으로 잘 나다니지도 않고 대부분 무계획 속에 사는 나로서는 이렇게 높은 빈도로 밖으로 나가 만남을 갖는 게 일상 패턴을 많이 벗어난 즐거운 탈선 같은 느낌도 든다. 

이 친구에 대해서 자세히 쓰기는 뭐 하지만, 어쨌든 나보다는 훨씬 더 도전적이고 열정적으로 살아왔고, 현재도 진행형인 사람이라, 만날 때마다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존경심이 느껴질 정도.

어제는 멀리 교외까지 나가 맛있게 식사를 하고,
동네로 돌아와 차를 마시러 가서는 대뜸 선물이라며 큼지막한 액자와 쇼핑백을 차에서 꺼내 들고 들어온다.

홍콩에 다녀오면서 사 왔다며 쿠키를 건네주는데, 우리 아들이 호두 알러지가 있으니 어른들만 먹는 게 좋겠다며..
사실 여행을 다녀오면서 누군가의 선물을 고르고 챙겨온다는 일 자체가 얼마나 번거롭고 귀찮은 일인지 잘 알기도 하고, 특히나 난 가족한테도 선물 같은 걸 잘 챙기지 못하는 편이라 이런 세심함이 참으로 놀랍다. 

그리고 쿠키와 함께 가져온 액자의 정체는 바로,

 

LIFE Calendar‘ 라는 커다란 포스터 타입의 달력액자. 

강렬한 노란색 바탕의 큼지막한 종이에 네모 칸이 수백 개 빽빽하게 인쇄된 낯선 액자다. 

세로축은 나이를,
가로축은 1년의 1차(1~52주),
그러니까 하나의 네모 = 1주일인 거다.

기본적으로는 10세까지 까만색으로 칠해져 있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에는 색을 칠하고 아직 남아있는 빈칸은 곧 앞으로 남은 인생이 되겠다.
내가 알고 있는 ‘달력’과는 너무도 달라 굉장히 생소한 개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한참을 이걸 놓고 둘이 한참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커피를 마시다 집에 들어왔는데 이 달력이 볼수록 참 재밌다. 

 

나는 이런 방식의 달력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찾아보니 의외로 꽤나 유명했는데,
Tim Urban 이란 사람의 블로그를 통해 알려지게 된 것 같다.

일단 기본적으로 이 시각화 방식은 꽤나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시간의 유한함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하자”

내가 인생의 어느 시점까지 와 있는지 한눈에 시각적으로 확인이 가능하고,
인생 전체를 놓고서 큰 목표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세우는데 용이하며,
매주를 한 칸씩 채워나가며 일기 쓰듯 기록을 하거나 전체를 돌이켜 보기에 꽤나 의미 있는 시각화 형태.

 

source :waitbutwhy.com

Tim Urban의 블로그를 보다가 흥미로운 몇 가지 이미지를 가져와 봤다.

이 캘린더의 기존 목적이나 사용법에는 살짝 벗어나는 같지만, 90세까지 표시된 이 시각화 캘린더 위에 유명인들의 사망 시기를 표시한 것.
요절한 아티스트들, 병마에 시달리다 떠난 사람들. 캘린더 위쪽에서 멈춘 그들의 인생을 보는 게 참으로 안타깝다.

하지만 이 캘린더는 죽음을 자극적으로 소비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매주 가까워지고 있다”, “삶은 유한하다”는 현실과 마주하고 각인하게 되는,
그래서 오늘이라는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 느끼게 해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100세 시대에 90세까지만 표시된 건 조금 아쉽긴 하지만)

 

 

source :waitbutwhy.com

이번에는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과 아이작 뉴턴(Issac Newton)의 젊은 시절 업적들을 시각화 한 이미지.
파란색은 아인슈타인, 초록색은 뉴턴, 그리고 주황색은 일반인(아마도 Tim Urban).

아인슈타인

약 26세 – 특수 상대성이론 발표.
약 36세 – 일반 상대성이론의 기초 개념을 담은 논문 발표.
약 43세 – E = mc² 방정식 발표

아이작 뉴턴

약 23세 – 만유인력의 법칙 정립.
약 27세 – 빛의 스펙트럼에 대한 발견 발표.
약 30세 – 미적분 발명

Tim Urban

약 34세 – 항공사 마일리지의 정체에 대한 이론 정립.
약 38세 – 닭이 길을 건넌 이유에 대한 진지한 고민.
약 48세 – 암흑물질을 설명하다가 암흑에너지랑 헷갈림(하지만 어차피 모르니까 자신감있게 말함).

ㅋㅋㅋ 긍정적이네.
너무 인간적이라 웃음이 난다.

 

어쨌든,

나는 사실 인생에 대해 평소에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는 타입은 아니다.
복잡한 철학이나 깊은 명상 같은 건 잘 맞지도 않고, 그냥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하루하루를 즐겁게 사는 게 내 스타일.
그런데 이 독특한 캘린더 선물을 받고 꽤나 재밌는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된다. 

뭐 일단 이 큰 캘린더를 받자마자 “반 이상을 까맣게 칠하고 시작해야 하네?” 하는 나이에 대한 현실 자각.
그러면서 꽤나 재밌는 인생을 오래도 살아왔구나.. 하는 뿌듯함?
과거에 연연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동안 울고 웃고 사랑하고, 실패도 경험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이렇게나 많이 지나왔구나 하는 감상에 잠깐 젖어보게 된다.

그리고 나서는 그래도 아래쪽에 아직 많이 남은 칸들을 바라보면서는, 
도대체 뭘 하고 살아야 앞으로 이 칸들을 의미 있게 채울 수 있을까? 하는 셀렘과 가벼운 걱정 조금.

그리고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늦게까지 자다 일어나 강아지 쓰다듬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이 순간도 나에게는 또 하나의 소중한 한 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