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뜰리에를 준비하면서 이런저런 목공장비들을 하나 둘 사 모으는 중이지만, 아직 본격적인 구입단계로 뛰어들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라우터 비트(Router Bit).
목공을 시작한 초기 멋모를 때에는 라우터 하나를 사두고 몇 가지 기본적인 비트만 갖추면 웬만한 작업은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목공방을 다닌 지 1년이 넘으며 실제로 이것저것 만들어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다.
모서리를 둥글게 깎는 것만 해도 원하는 R값에 따라 비트가 전부 달라지고, 홈을 파거나 턱을 만들거나 템플릿을 따라 부재를 복제하거나 손잡이 홈을 만들 때도 각각 그 작업에 딱 적합한 비트들이 따로 있다. 게다가 같은 용도의 비트 안에서도 직경과 절삭 길이가 다르고, 베어링의 위치가 다르고, 날의 방향과 개수도 다르다.
결국 새로운 작업을 하나 둘 진행할 때마다
‘아, 이런 비트도 사야겠구나.’
하는 일이 반복된다.
그리고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내가 사용하려고 구입해 둔 라우터는 페스툴(Festool)의 OF 1400 EBQ-Plus, 그리고 가볍게 엣지 가공을 하기 위해 구입한 엣지 트리머 OFKC 500이 있는데, 둘 다 같은 라우터 계열의 공구이긴 하지만 사용하는 비트 시스템이 아예 다르다.
OF 1400은 일반적인 콜릿(Collet)에 비트의 섕크(Shank)를 물려 사용하는 범용 라우터인 반면, OFKC 500은 엣지 가공에 특화된 소형 엣지 트리머로 전용 비트를 스핀들에 직접 장착하는 구조.
따라서 OF 1400용으로 가지고 있는 비트를 OFKC 500에 옮겨 사용할 수도 없고, OFKC 500용 비트 역시 OF 1400과 공유할 수 없다.
같은 라두터 계열의 기계이니 비트를 좀 나눠 써도 좋을 것 같지만 현실은 비트를 두 가지 계열로 각각 준비해야 하는 것.
그런데 OF 1400 안에서도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OF 1400의 기본 구성에는 비트를 잡아주는 콜릿이 8mm와 12mm로 제공되는데, 미국에서 판매되는 라우터 비트에서는 1/4″와 1/2″ 섕크가 매우 흔한 편. 이 역시 야드파운드법(yard-pound system)의 문제겠지.


Festool, 12.7mm Router Collet / SZ-D 12.7 (494465)
여기서 12mm와 1/2″는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1/2″는 정확히 12.7mm이기 때문에 1/2″ 섕크 비트를 12mm 콜릿에 당연히도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많이 구입해 사용할 것 같은 북미 규격의 1/2″ 비트를 위해 별도로 구입한 것이 페스툴의 SZ-D 12,7 콜릿.
내 OF 1400에 장착해 12.7mm, 즉 1/2″섕크의 라우터 비트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전용 콜릿이다.
결국 라우터 비트는 용도에 따라서만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기계가 달라져도 늘어나고, 사용하는 지역의 규격이 달라지면 비트는 물론 콜릿까지 늘어난다.
이쯤 되면 라우터 비트가 무한 증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구입한 우드페커스(Woodpeckers)의 Ultra-Shear(울트라 시어) 비트 네 종류는 그렇게 증식하고 있는 중인 비트 중 일부.
지난번에 구입 기록을 했던 Festool, Router Bits Set(링크)와 함께 무한증식의 시작점이 될 비트들이 되겠다.
저 세트를 구입할 때만 해도 ‘아무렴 페스툴에서 제공하는 비트 세트인데, 이거 하나만 있으면 대충 범용적으로 다 쓸 수 있겠지’ 하는 순수(?)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라우터 비트(Router Bits)
라우터 비트를 전부 분류하려면 한도 끝도 없겠으나, 내가 이해하고 구입할 때 필요한 정도로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Straight / Spiral Bit
홈을 파거나 재료를 잘라내는 가장 기본적인 비트. Spiral Bit는 날의 방향에 따라 Up-cut, Down-cut으로 나뉘며 두 방향을 조합한 Compression Bit도 있다.
Flush Trim / Pattern Bit
베어링이 템플릿이나 이미 가공된 면을 따라가면서 다른 부재를 같은 형상으로 복제한다. 베어링의 위치에 따라 사용하는 방법도 달라진다.
Roundover / Chamfer / Profile Bit
모서리를 둥글게 만들거나 사선으로 깎고, 특정한 장식 프로파일을 만드는 비트.
Groove / Rabbeting Bit
판재에 홈이나 턱을 만들어 다른 부재를 끼우거나 결합할 때 사용한다.
Joinery Bit
Dovetail, Finger Joint, Lock Miter 등 특정한 목재 결합부를 만드는 비트.
Surfacing / Spoilboard Bit
넓은 면을 얇고 균일하게 깎아 평탄하게 만드는 대구경 비트.
그리고 이 모든 비트를 고를 때 반드시 함께 확인해야 하는 것이 섕크(Shank)의 규격이다.
섕크는 비트에서 라우터의 콜릿에 물리는 원통형 축 부분.
미국 계열 제품에서는 1/4″(6.35mm)와 1/2″(12.7mm)가 대표적이고, 미터 규격에서는 6mm, 8mm, 12mm 등이 사용된다.
섕크가 굵으면 굵을수록 비트가 받는 힘(부하)이라든지 비트 자체의 강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실제로는 작업할 때 진동의 양이나 안정성에도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특히 큰 비트나 부하가 큰 작업에서는 일반적으로 굵은 1/2″ 섕크가 강성과 안정성 면에서 유리하기 때문에 전문적이거나 본격적인 라우터 비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 같다.

Ultra-Shear는 Woodpeckers에서 제작/판매하는 프리미엄 절삭공구 브랜드다.
우드페커스라고 하면 빨간색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정밀 측정공구와 각종 목공용 지그가 먼저 떠오르지만, Ultra-Shear에서는 라우터 비트를 비롯해, 원형 톱날 같은 절삭공구를 전문적으로 다룬다.
제품을 살펴보면 하나의 제작 방식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용도에 따라 Solid Carbide, 초경 팁을 브레이징한 Carbide Tipped, 날만 교체할 수 있는 Replaceable Carbide Insert 등의 구조를 다양하게 접목해 제작한다.
다만 가격이 상당히 비싼 편.
목공 초짜다 보니 목공 도구들의 가격에 대한 기준점이 없어서 이게 비싼 건지 어떤 건지 잘 몰랐었는데, 국내 쇼핑몰 등에서 구할 수 있는 유명 해외 라우터 비트 전문 브랜드들과 비교해 Ultra-Shear의 가격은 쉽게 집어 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제품에 따라 Solid Carbide를 사용하거나 교체식 초경 인서트 구조를 적용하고, Compression처럼 복잡한 절삭 형상을 사용하며, 비교적 특수한 가구 제작 작업을 겨냥한 제품이 많다는 점 등이 가격을 높이는 요인으로 볼 수 있겠다.
물론 비싸다고 모든 작업에서 반드시 그만큼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뜻은 아니겠지만.

Ultra-Shear, Spoilboard Router Bit (US515SF)
1-1/2″ Diameter / 1/2″ Shank
첫 번째는 Spoilboard Router Bit.
넓은 면을 평탄하게 만드는 Surfacing / Spoilboard 계열의 비트로 내가 구입한 것은 1-1/2″, 약 38.1mm 직경에 1/2″ 섕크를 사용하는 모델.

지난 Woodpeckers, Slab Flattening Mill Pro 포스팅(링크)에서 한참 떠들었던 엔드 그레인(End Grain) 패널을 만들어 보려고 구입해 봤다.
일반적인 작은 비트로도 조금씩 표면을 깎을 수야 있겠지만, 아무래도 넓은 판재나 슬랩 전체를 평탄하게 만들 때는 한 번에 가공할 수 있는 폭이 넓은 비트가 훨씬 효율적이다. 물론 넓은 면을 깎아내는 만큼 걸리는 부하도 크겠지만.


이 비트의 특징은 세 개의 교체식 Carbide Insert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커터 전체를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목재를 절삭하는 초경 인서트만 교환할 수 있기 때문에 대구경 평탄화 비트처럼 절삭날의 사용량이 많은 공구에서는 합리적인 구조. 아뜰리에에 구입한 Laguna의 자동대패와 수압대패 역시 이런 형태의 교체식 날을 사용하고 있던데..

Ultra-Shear, Replacement Carbide Insert 3 Pack (20132)
그래서 함께 구입한 것이 Replacement Carbide Insert 3 Pack.
US515SF 비트에 장착되는 교체용 초경 인서트 세트다.
당장 사용할 물건은 아니지만 이런 전용 소모품은 막상 필요해졌을 때 구하지 못하면 비트 전체를 사용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어차피 미국에 주문하는 김에 한 세트를 같이 준비해 두었다.

Ultra-Shear, Finger Grip Groove Router Bit (US512FGGR)
Round Profile / Carbide Tipped / 2-Flute
두 번째는 이름 그대로 손가락을 걸 수 있는 손잡이 홈을 만드는 비트.
별도의 손잡이를 달지 않고 도어나 서랍의 가장자리에 손가락이 들어갈 홈을 가공하는 방식에 사용하는 비트.


손가락 홈을 만드는 비트도 수십 가지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일단 내가 구입한 US512FGGR은 그중에서도 부드러운 곡면을 만드는 Round Profile 타입. 트레이라든지 도마, 아니면 작은 플레이트 등을 만든 다음에 측면에 살짝 홈을 넣어 손쉽게 들어 올릴 수 있도록 해보려고 구입했다.


절삭부는 Carbide Tipped, 2-Flute 방식.
비트 전체가 초경으로 만들어진 Solid Carbide가 아니라 강철 몸체의 절삭부에 초경 팁을 결합한 구조이고 두 개의 날이 동일한 프로파일을 가공한다.
이런 비트가 없이도 얼마든지 트레이나 가구를 만들 수는 있겠지만, 있으면 또 아무래도 활용할 방법의 가짓수가 늘어나는 거 아니겠음?

Ultra-Shear, Metric Half Round Router Bit for Domino Tenons (US508MHR)
이 Metric Half Round Router Bit 역시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구입한 비트.
이 비트는 Festool Domino 시스템에서 사용하는 8mm Domino Tenon(도미노 테넌)을 직접 제작하기 위한 Half Round Bit다.
일반적으로 도미노(Domino)를 사용할 때는 Festool에서 판매하는 완제품 도미노 테넌(Domino Tenon)을 사용한다.
편하고 정확하고 굳이 직접 만들 이유도 별로 없다. 사실 이걸 직접 만드는 순간 도미노의 장점이 반토막 나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미노가 숨는 게 아니라 도미노 테넌의 단면이 보여지는 작업물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 모양이 나름 예쁘기도 하고, 월넛이나 메이플 우드, 흑단 같은 개성 강한 수종을 이용해 도미노 테넌을 만들어 끼워, 결합력과 함께 장식적인 요소로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구입을 해봤다.
게다가 모르긴 몰라도, 작업하다 보면 기성 도미노보다 긴 테넌이 필요할 수도 있잖아?

도미노 테넌의 단면을 보면 단순한 직사각형이 아니라 캡슐 알약 모양으로 양쪽 끝이 둥글다.
이 비트를 사용해 준비한 목재의 가장자리를 양쪽에서 가공하면 도미노 기계로 파낸 둥근 끝부분에 꼭 맞는 테넌이 만들어지는 것.

Ultra-Shear, Furniture Maker’s Compression Pattern Router Bit (US5720PC)
Solid Carbide
마지막은 Furniture Maker’s Compression Pattern Router Bit 라는 제품.
이번에 구입한 네 종류 가운데 가장 본격적인 느낌(?)이 드는 비트다.


패턴 비트(Pattern Bit)는 목공방에서도 상당히 자주 쓰는 비트 중 하나.
베어링이 템플릿을 따라 움직이면서 목재를 같은 형상으로 복제하는 데 사용한다.
가구를 만들면서 곡선 부재나 같은 형태의 부품을 여러 개 만들어야 할 때 유용하다.

이 제품에서 중요한 단어는 Compression이다.
일반적인 Spiral Bit에는 Up-cut과 Down-cut이 있다.
Up-cut은 칩을 위쪽으로 끌어올려 배출하기 좋지만 목재의 윗면을 들어 올리는 방향으로 힘이 작용하기 때문에 가장자리의 tear-out이 발생할 수 있다. 실제로 굉장히 많이 겪는 현상.
Down-cut은 반대로 윗면을 눌러주기 때문에 상부 가장자리를 깨끗하게 가공하기 좋다.
Compression Bit는 이 두 방향의 나선형 날을 하나의 비트에 조합한다.
목재의 위와 아래 표면을 모두 재료 안쪽 방향으로 누르면서 절삭하기 때문에 합판이나 베니어처럼 양쪽 면의 뜯김을 줄이는 것이 중요한 재료에서 특히 유용하다고 한다. 물론 원목에서도 결 방향이 계속 변하는 곡선 부재를 템플릿 가공할 때 특히 신경이 덜 쓰일 수 있을 듯.

절삭부는 Solid Carbide.
초경 팁만 붙여놓은 것이 아니라 절삭부 자체가 초경으로 만들어져 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2″, 약 50.8mm에 달하는 긴 절삭 길이.
일반적인 짧은 Pattern Bit로는 한 번에 처리하기 어려운 두꺼운 가구 부재를 템플릿에 맞춰 가공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긴 패턴 비트가 있다고 해도 하드우드를 가공하게 되면 부하가 커서 나눠서 덜어내는 게 보통이지만, 그래도 덜어낼 부분을 최소한으로 만들어두고 이 비트를 이용해 한 번에 면을 깎아내면 그 가공면이 굉장히 깔끔할 것 같아서 벌써 기대가 된다.
물론 긴 절삭부, Solid Carbide 소재, Compression Geometry가 한꺼번에 들어간 만큼 가격 역시 만만치 않다.
이번에 구입한 비트 중에서도 가격을 보고 잠시 멈칫하게 만든 녀석.
이번에 구입한 네 개를 늘어놓고 보면 라우터 비트가 왜 계속 늘어나는지 잘 보인다.
US515SF는 넓은 면을 평탄하게 만드는 비트.
US512FGGR은 가구에 손가락 손잡이 홈을 만드는 비트.
US508MHR은 원하는 목재로 도미노 테넌을 직접 만드는 비트.
US5720PC는 두꺼운 가구 부재를 템플릿에 따라 깔끔하게 복제하는 비트.
서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리고 여기에 OFKC 500용 비트들은 또 완전히 별개.
결국 하나를 샀다고 다음 비트가 필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작업 방법을 하나 알게 될 때마다 필요한 비트가 하나씩 더 보인다.
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라우터는 저렴한 기계네.
어차피 비트 몇 개 사면 라우터 가격 훌쩍 넘어가는데.. 사실 본체는 라우터가 아니라 비트였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