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은 섬세한 심리 묘사와 강렬한 서사로 유명한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다. 
장르문학을 주로 다루는 1966년생 작가로 시각적인 묘사가 뛰어나기로 유명하고. 
이미 베스트셀러 작품을 여럿 출간했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나는 사실 이번에 그녀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내가 이번에 구입해 읽은 책은,
2009년 출간한 장편소설 ‘내 심장을 쏴라’ 와 2016년 출간한 장편소설 ‘종의 기원’ 두 권.
요 며칠 너무 몰입해서 잘 읽었고 뭐라도 기록해두고 싶어 간단한 독후감으로 포스팅을 작성해보기로 했다.

워낙에 유명한 소설 두 권이고 이미 스포일러가 무의미할 정도로 출간된 지 오래된 작품이지만,
그래도 미리 알면 서운할 내용이 들어가 있을 수 있으니 민감하신 분들은 주의하시길.

 


 

나는 팔을 벌렸다. 총구를 향해 가슴을 열었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야.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

 

내 심장을 쏴라

 

2009년에 출간된 정유정 작가의 장편소설 ‘내 심장을 쏴라’는 제 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수상경력과 강렬한 제목, 그리고 스타작가인 정유정의 이름을 보고 구입해 본 책이다.

정유정 작가의 작품을 읽은 건 이 책이 처음이라 기대가 컸는데 특유의 몰입감 있는 서사와 치밀한 묘사, 간간히 터지는 위트 있는 대사까지 모두 마음에 들었지만 특히 인간 내면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집요함이 인상 깊은 작품이었다.

 

이야기는 주인공 ‘이수명’이 어머니의 죽음 이후 정신분열 증세를 겪고, 결국 강제로 폐쇄 병동에 수용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가면서 만나게 되는 동갑내기이지만 뼈속부터 다른‘승민’과의 만남이 그 중심에 있다.

정유정 작가는 간호사로 일했던 경력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때문일까? 정신병동이라는 다소 낯설고 폐쇄적인 공간이 이토록 생생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단순한 설정이 아닌, 실제로 내가 발을 들인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현실감이 넘치는 묘사들이 책 전반을 가득 채운다. 알고 보니 작가는 이 소설을 위해 직접 정신병동 실습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책 말미 ‘작가의 말’까지 읽어보니 작가의 그 철저한 고증과 설정에 대한 노고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초반 진입장벽이 조금 있는 편이라고 생각되는데, 아무래도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환경과 다양한 인물군들에 익숙해지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릴 수 있겠다. 하지만 설정 등에 꽤 익숙해진 상태가 되는 작품 후반부에는 대충 어디에서 어떤 모습일지 눈앞에 떠오를 정도로 이 이야기가 만들어낸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처음엔 불편하고 어두운 현실이다. 강제로 병원에 수용된 주인공은 타의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는 세계 속에서 갈 곳 없는 감정과 기억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 불편한 현실 속에서도 그는 점차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고, 두려움을 직면하고, 결국엔 자신을 회복해 나간다.

작품은 절망을 희망으로 뒤바꾸는 성장의 이야기다. 단지 병동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갇혀 있던 마음에서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리고 이 모든 여정은 주인공 이수명의 1인칭 시점으로 풀어지기 때문에, 그의 감정 하나하나가 독자의 마음에 깊게 스며들게 된다.

 

책을 덮고 나면 묘하게 벅찬 마음이 남는다. 한 사람의 내면을 따라가며, 어쩌면 나도 모르게 마음 한편에 있던 감정들을 들여다본 느낌이랄까. 폐쇄 병동이라는 극한의 공간은 이야기의 장치였을 뿐, 결국 그 안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건 ‘나’라는 존재다.

참고로 이 소설은 2015년에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는데, 유튜브에서 트레일러를 보았더니 내가 좋아하는 배우 이민기도 출연을 했네?. 그런데 왠지 이 작품은 영화로 찾아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나중에는 또 모르겠지만 캐스팅 목록만 봐서는 내 상상속의 모습과 너무들 달라서 지금은 그냥 내 머릿속에서 상상하고 느끼는 대로 냅두고 싶다.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 것이다. 올 것은 결국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불시에 형을 집행하듯, 운명이 내게 자객을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종의 기원

 

앞서 ‘내 심장을 쏴라’에 대해 이야기하며 초반 진입 장벽을 언급했었는데, 이 작품은 그 반대.
시작부터 몰입감이 대단하다.
1부 시작 문장인 “피 냄새가 잠을 깨웠다” 부터 확 끌려 들어가더니 마지막 페이지까지 숨을 죽이고 보게 만드는 엄청난 흡인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일단 줄거리조차 간단히 요약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사이코패스 주인공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이지만, 단순한 범죄 스릴러와는 다르다.
작품은 시간을 과거에서 현재로, 또다시 과거를 오가며, 주인공 한유진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를 천천히 보여준다.
단순히 그를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엄청난 사이코패스의 탄생을 목도하는 듯한 기분이 든달까?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과 같은 제목을 가진 이 소설은, 인간 진화의 다음 단계가 어쩌면 ‘호모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상상을 떠올리게 한다.
‘내 심장을 쏴라’처럼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주인공 한유진의 심리와 감각이 독자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의 숨소리, 관자놀이 어딘가로 피가 쏠리는 감각, 마구 차오르는 심장 박동, 미세한 손 떨림까지..
너무도 디테일하고 현실감 있는 묘사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 역시 감정적으로 휘말려 몰입하게 되어 읽는 내내 숨이 막히고 마음이 힘들다.

기존의 많은 영화나 소설 속 ‘악인’들은 주로 관찰자의 시선에서 그려졌다면, 이 작품은 그 악의 내부로 들어가 직접 숨을 쉬게 만든다.
도덕적 기준이나 윤리적 규범을 넘어, 인간 본성 안에 있는 근원적인 악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데 보편적인 교육과 사회화로 만들어진 내 자아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영역.

뉴스나 기사에서 접해온 잔혹하고 추악한 사건들, 애써 외면해온 인간사의 어두운 면들을
작가는 굳이 꺼내어 눈앞에 가져다 놓고, 그것도 매우 생생하게 펼쳐 보인다.
단순히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지독한 악(惡)함 안에 모호하게 흩뿌려진 인간의 본성 안에서 어떤 포인트에 공감하고 어떤 부분을 스스로 단단하게 지켜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는 작품.

시작부터 끝까지 완전히 몰입해서 읽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읽는 내내 너무 힘들고 괴로웠다.
평소 인물의 세심한 감정변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을 좋아하지만, 이 작품은 공감보다는 ‘침잠(潛)’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너무도 잘 쓰인 작품이고, 완성도도 높지만 누군가에게 “좋았으니 꼭 읽어봐” 하고 쉽게 추천하기는 어려운 책, 하지만 언젠가 한 번쯤은 마주해야 할 작품이기도 한 것 같다.

 

 

총평

정유정 작가의 소설 고작 두 작품을 읽었을 뿐이지만,
소설에서 어떤 사건 자체 보다는 그 사건을 맞닥뜨린 인간의 심리를 묘사하는 작가의 스타일이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스타일. 
작품 내용이나 전개 방식은 아무래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나처럼 스타일만 맞는다면 엄청나게 몰입해서 볼 수 있을 작품들이다. 

그녀의 대표작인 ‘7년의 밤’, ’28’, ‘종의 기원’까지를 ‘악(惡)의 삼부작’이라고 묶어 부르고,
지금은 ‘완전한 행복’, ‘영원한 천국’과 함께 또 한 권으로 마무리되는 ‘욕망(望)의 삼부작’을 쓰고 있다고 한다.

다음번에 정유정 작가의 소설을 또 읽는다면  ‘7년의 밤’을 읽어봐야겠다.